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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체스

Author: Youngjin Kang

Date: Summer 2012

매일 밤마다 지구 곳곳에서는 심령들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지상이 낮동안 밀림의 포식자들과 사람들의 싸움터라면, 밤동안에는 보이지 않는 혼령체들의 싸움터인 것이다. 다만 그들의 싸움은 공기중으로 섞여 들어가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미세한 파동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관찰하기 어려울 뿐이다.

사실 인간이 사는 집의 안방에서도 밤마다 귀신 두어명 정도가 티격태격하며, 때로는 주먹다툼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느끼려면 일단 그들 주변에서 잠을 청해야 하고, 의식활동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을 정도로 깊은 숙면에 빠져야 하며, 흔히 가위눌림이라고 불리우는 '수면마비' 상태에 빠져야 한다. 귀신들의 싸움을 관찰하고 싶다면 우선 아주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예컨대 밤에 잠을 자다가 3시간만에 알람이 울리도록 해서 깨어나면 그게 가능하다. 3시간만에 일어나면 일단은 죽을 맛일 것이다. 당신의 온몸은 달콤한 잠을 더이상 지속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할 것이고, 깨어있는 것은 곤욕일 것이다. 그러나 두 발로 서서 절대로 다시 잠들지 말고 계속 깨어있어야 한다. 그 상태로 4~5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에 다시 잠자리에 들면, 약 20분동안 아주 생생한 꿈을 꿀 수 있다. 만약에 우연히도 귀신들 몇몇이 잠들어 있는 당신 주변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당신은 꿈을 통하여 두 눈과 두 귀로 그 광경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귀신들의 형상을 또렷하게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나 귀신이라 생각되는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허상에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귀신의 움직임을 확인할 방법은 단 한가지 - 바로 귓가에 울리는 요란한 굉음이다. 그것은 때로는 비행기 내부의 진동음같을 때도 있고 (귀신들이 그냥 걸어다닐 때), 거대한 공장기계의 엔진이 돌아가는 음일 때도 있으며 (귀신들이 말다툼을 벌일 때), 깃털로 뒤덮힌 고장난 경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일 때도 있다 (귀신들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할때). 이는 심령체들이 일으키는 파동 때문이다.

만약에 심령체들의 파동을 관찰장비로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귀신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우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싸움방식을 전파의 분석만으로도 시각화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면, 우리는 귀신들의 싸움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며 그것을 하나의 스포츠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려면 우선은 경기장을 조성해야 할 터인데, 이는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다. 실시간으로 정확한 경기정보를 수집하려면 관찰기구가 외부의 전파나 다른 파동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기가 벌어지는 무대는 납 등의 견고한 물질로 이루어진 차단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관찰기구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귀신들의 정확한 싸움과정을 기록해 나갈 수 있다.

올림픽의 새로운 경기종목인 "귀신싸움"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단은 여닫이식 천장을 가진 커다란 스타디움 경기장에 관중들이 빽빽이 들어찬다. 그들이 자리에 앉는 동안 일꾼들은 세로 8칸, 가로 8칸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체스판을 경기장 한가운데에 부착시킨다 (체스판의 규모는 칸당 1미터정도 된다). 그러면 머리에 헤드폰을 장착한 엔지니어들이 일꾼들의 도움을 받아 체스판을 빙 둘러서 차단벽과 관찰기구들을 설치한다. 그들은 설치된 차단벽의 일부를 열어놓은 상태로 기다리고, 곧 경기장의 양쪽 끄트머리에서는 선수 두 명이 경기복 (올림픽 마크가 새겨진 영매 복장)을 입은 채로 카펫을 따라 입장한다. 두 선수는 차단벽의 열린 틈새로 들어가서 체스판 위에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칸마다 하나씩 배치한 뒤, 체스판 밖으로 나와 서로에게 인사한 뒤 헤어진다. 부정행위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한 몇차례에 걸친 검사가 끝나고 나면, 차단벽들은 닫히고 경기는 시작된다.

이 선수들이 체스판 위에 배치하는 물건들은 소위 말하는 "귀신붙은" 것들로, 아픈 사연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물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이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대부분은 골동품점 주인, 재벌 골동품 수집가, 아니면 그냥 재벌들이다. 그들은 아주 싸움 잘하는 심령체들에 의해 빙의된 물건들만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다. 그래야만 경기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런 물건들의 예를 들자면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의 파이프 담배, 인정받지 못한 채 외로운 일생을 살았던 무명 소설가의 타자기, 중세의 한 왕이 사용하던 술잔 등이 있다.

경기가 시작되면 차단벽이 둘러싸인 체스판을 밝히던 조명은 꺼지고, 체스판은 암흑에 휩싸인다. 그러면 물건들 속에 빙의되어 있던 귀신들은 하나 둘씩 깨어나 싸움을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전문 심령활동 해설자는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전파신호를 해독하여 경기상황을 중계한다. 해설자의 설명에 따르면, 맨 처음 1번 선수의 축음기 귀신과 2번 선수의 방석 귀신 사이에서 격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2번 선수의 주전자 귀신이 갑자기 성큼성큼 대각선으로 걸어가더니 1번 선수의 만년필 귀신의 복부를 발로 가격했고, 그 광경을 보고 화가 난 1번 선수의 향수 귀신은 홧김에 같은 편이었던 안경 귀신의 뒷통수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자 1번 선수의 진영에서는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귀신싸움 경기는 2번 선수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가 끝나면 차단벽을 해제되고, 선수들은 다시 경기장 한복판으로 나와 자신들의 물건을 회수해 간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로 다시금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대기중이던 심령학자들은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탐지기를 휘둘러 본다. 물건 속으로 복귀하지 않고 경기장에 남아있는 귀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