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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의 공화국 - 4

Author: Youngjin Kang

Date: Winter 2012

지하 100층 밑으로는 약 300층 가량의 또다른 거대한 광산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고고학자들이 일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강한 압력으로 인해 지층의 각 부위에 눌려서 찌그러져 버린 단단한 기억의 화석들을 조심스럽게 발굴해내고, 그렇게 발굴한 화석들을 조심스럽게 짜맞춤으로써 잊혀진 옛날의 기억의 결정체를 온전한 형태로 회복하기 위해 애쓴다. 기적적으로 본래의 형태를 회복한 결정체는 그야말로 무의식에게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 300층 밑에는 다양한 학문의 종사자들이 일하고 있다. 지하 301~310층에는 기억관련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지상 1~3층의 로비에 있는 기계에서 해석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 골칫덩어리의 결정체들을 도맡아 정밀분석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의뢰가 들어온 결정체들의 분자구조를 여러 실험을 통해 세세히 분석함으로써, 완벽하지는 않지만 엇비슷한 해석에는 성공한다. 이들이 해석한 기억은 “수동으로 해석됨” 이라는 주석이 붙은 문서자료로 탈바꿈되어 무의식의 심장부로 이동된다.

연구소 밑으로는 약 200층의 공간에는 거대한 서재들이 있다. 이곳은 수많은 책상들로 가득 차 있고, 각 책상에는 인문학자, 역사학자들이 한두명씩 모여앉은 채로 무의식의 다양한 문서자료들을 참조한다. 이들은 참조한 자료들에다가 그들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서 새로운 학술자료들, 즉 문서들을 만들어낸다. 이들이 만들어낸 제 2의 자료들 또한 무의식의 심장부로 운송된다.

서재들 밑으로는 질서유지를 위한 18층 높이의 거대한 경찰서 겸 막사가 자리잡고 있고, 그 밑에는 정확히 432층 높이의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각 층은 마치 금고처럼 외부 공간과 단절되어 있고, 이곳으로의 출입은 학자나 잠재의식의 의원/비서들과 같은 소수의 고위급 관계자들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도서의 대출/반납은 아주 엄격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에 관련된 법률의 위반에는 무의식의 법 집행관들의 칼같은 처벌이 뒤따른다. 도서관의 각 층은 고유의 테마로 디자인되어 있다. 예컨대 조명이나 장식, 인테리어 양식이나 책장의 모양 따위가 층마다 제각기 다르다는 뜻이다. 분홍빛으로 가득 찬 현대적인 아트데코 분위기로 디자인된 코너가 있는가 하면, 어두침침하지만 현란한 네온사인들과 희미한 헤비메탈 음들로 가득 채워짐으로써 사이버펑크 풍으로 디자인된 코너도 있다. 코너들의 대부분 공간을 메우고 있는 책장들은 위에서 운송된 문서자료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각각의 문서자료는 코너에 진열됨과 동시에 일련번호가 매겨지기 때문에 개별적인 대출/반납이 가능하다. 이곳 도서관은 총 43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층은 하나의 독립적인 코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뇌 속에는 총 432개의 테마를 가진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들이 있는 셈이다.

이제 지하의 끝까지 도달하려면 50층이 남아있다. 도서관 밑을 차지하는 12층의 공간은 총 12개의 사무실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무의식을 대표하는 12명의 현자들을 돕는 12명의 비서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잠재의식의 의원들을 돕는 개인 비서들처럼, 현자들의 자료참조를 돕기 위해 도서관에서 자료를 수집해 요약해주는 역할을 한다. 비서들의 사무실 밑으로는 또다른 12층의 공간이 있는데, 이곳은 총 12명의 현자들을 위한 개인 서재들이다. 서재에서 현자들은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공정한 판단과 재판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참조한다.

그 밑의 6층 공간은 중간규모의 아담한 홀로, 이곳에는 커다란 벽난로와 푹신한 벨벳소파들, 극동아시아 풍의 카펫과 뿔달린 야생동물들의 벽걸이용 머리박제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곳은 휴식용 홀인데, 환한 조명들과 클래식 음악이 주를 이루는 잠재의식의 휴식 홀과는 달리 이곳은 통나무 냄새로 가득 찬 붉고 어두운 공간이다. 또한 이곳에는 현란한 바이올린 음악 대신에 낮은 음향의 재즈 곡들이 울려 퍼지고 있어서, 현자들로 하여금 진부한 토론을 하거나 꾸벅꾸벅 조는 데에 최적화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현자들의 휴식공간 밑에는 10층 높이의 거대한 중앙 홀이 있는데, 이곳은 사방이 온통 얼음벽으로 이루어진 매우 추운 곳이다 (에어컨을 항상 틀어놓기 때문이다). 푸르스름한 무드조명으로 인해 지극히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되는 이 공간은 현실세계로 치면 대법원으로, 이곳에서는 무의식의 대표인 Ego와, 그를 따르는 12명의 현자들이 하루에 한번씩 모여서 몇차례의 중대한 재판을 연다. 여기서 말하는 재판이란 정부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요들을 다루는 세세한 것들이 아니라, 그들의 뇌 자체가 몸에 행사하는 결정들이 옳으냐 그르냐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무의식의 핵심 일원들은 언제든지 의식의 대표자인 Psyche가 사람의 몸에 무슨 명령을 내리는지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통신망을 가지고 있다. 만약에 일원들 중에서 누군가가 Psyche의 결정이 비도덕적이었다고 판단한다면, Ego는 재판을 열어서 Psyche의 해당 결정에 법적 제제를 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한다. 재판이 열리면 Ego는 판사가 되고, Psyche의 결정에 불만을 제기했던 현자는 검사가 되며, Psyche의 결정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현자들 중 한 명이 변호사가 된다. 다른 나머지 현자들은 배심원이 되며, 현자들의 개인 비서들은 호출에 따라 필요한 참고자료를 법정으로 가져온다.

예를 들어서 어느날 잠재의식의 의원들이 회의 끝에 “왼쪽 다리를 앞으로 쭉 뻗게 해달라”는 제안서를 작성해서 Anima에게 제출했다고 가정해 보자. Anima는 그녀의 직속 부하들과 함께 제안서가 제시하는 이유들을 세세하게 검토해 본 후, 해당 제안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다. 결국 Anima는 완성된 제안서를 Psyche의 비서들에게 보내고, 비서들은 제안서의 내용이 너무 길지 않은 깔끔한 요약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것을 곧바로 Psyche의 집무실로 전송한다. 제안서를 받아 본 Psyche는 너무 졸립고 피곤한 나머지, 주변 사정을 참조하지 않고 그냥 제안서에 사인을 해 건물의 옥상으로 보내버렸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현재 왼쪽 다리의 앞에는 뜨거운 난로가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아무리 피곤했을지라도 위에서 전송해준 시각정보들을 살펴봤어야 한다. 그랬다면 그는 섣불리 “왼쪽 다리를 앞으로 뻗게” 만들자는 제안서에 사인을 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syche의 이러한 섣부른 행위를 막을 길은 없다. 그가 옥상으로 보낸 명령은 곧바로 옥상의 엔니지어에 의해 전파신호가 되어 하늘로 쏘아 올려져 버리고, 그 신호는 곧바로 당사자의 왼쪽 다리를 앞으로 펴지게 만든다. 그러면 당사자는 화상을 입거나 큰 사고를 초래할 것이고, 이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가 없다. Psyche의 결정들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있던 무의식의 현자들은 이 사실을 알아낼 것이고, 그들 중 누군가는 왼쪽 다리가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도록 허락한 Psyche의 부주의를 고발할 것이다. 그러면 무의식의 중앙 홀에서는 “Psyche의 왼쪽다리 움직임에 관련된 결정은 타당한 것이었나?” 에 관한 재판이 열릴 것이고, 결과는 당연히 “Psyche는 유죄이다”가 될 것이다. 판결이 내려지면 무의식은 섣부른 명령의 장본인인 Psyche에게 처벌을 내릴 것이다. 예를 들어서 무의식에는 건물 내부의 모든 난방시스템의 컨트롤 패널이 있는데, 판결내용에 따라 대표인인 Ego는 Psyche의 집무실의 온도를 낮춤으로써 그를 추위에 덜덜 떨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하도록 만들 수 있다. 만약에 Psyche가 성실하게 일하면서 주의깊은 결정만을 내린다면 그의 방 온도를 다시 올려주고, 뭐 그런 식의 “당근과 채찍” 원리로 의식과 무의식은 소통한다. 물론 Psyche 본인이 구체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직접적인 경고메시지도 보낸다.

중앙 홀 밑에는 의식이 내리는 명령들과 감각자료들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3층짜리 공간이 있고, 그 밑에는 극비리에 운영되는 Ego의 5층짜리 개인공간이 있다. 이곳은 오로지 대표자인 Ego의 출입만이 허용된 곳으로, 이 방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거대한 수정구 모양의 양자컴퓨터는 도서관에 저장된 모든 문서자료들을 스캔해서, 현재 뇌 밖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삼차원 입체영상으로 구현해 보여준다. 이곳에서 Ego는 뇌의 주인이 무슨 삶을 살고 있고, 그 주인의 주변 인물들과 환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수정구가 보여주는 광경은 바로 뇌의 주인, 즉 사람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장면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Ego가 이 비밀의 방에서 수정구를 바라보는 때는 바로 뇌의 주인이 깨어있을 때이고, Ego가 현자들과 함께 재판을 여는 때는 바로 뇌의 주인이 잠드는 때이다. Ego는 정체는 사실 우리 자신이다. Ego가 수정구를 통해 뭔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스스로의 두 눈을 통해 뭔가를 직접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Ego는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 그 자체이고, Psyche와 Anima는 그러한 “나”란 존재에 부수적인 도움을 주는 자들일 뿐이다. 우리 자신이 평소에 깨어있는 상태를 “의식”이라는 단어로 정의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의식의 대표인인 Ego야말로 우리가 하는 생각 그 자체의 대변인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Ego라는 자에게도 뇌가 있는데, 그의 뇌 속에는 Ego가 보는 모든 광경들을 실시간으로 감독하는 또다른 Ego가 있다. 그 Ego의 뇌 속에는 또다른 Ego가 있고, 그 속에는 또다른 Ego가 있으며, 그 속에는 또다른 Ego, 또다른 Ego, 그리고 또 또다른 Ego들이 중첩적으로 들어있다. Ego의 정체는 바로 우리의 자아 그 자체인데, 자아를 활동하게 하는 것은 자아 속의 자아이고, 자아 속의 자아를 활동하게 하는 것은 자아 속의 자아 속의 자아이기 때문에, 하나의 자아 속에는 무한한 자아의 층들이 있어야 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Ego의 비밀공간 밑에는 또다른 2층짜리의 비밀공간이 있다. 이곳은 지하의 바닥으로, 밑부분이 온통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허공의 받침대 위에 올라 서 있어야 한다. 이곳은 바로 우리 뇌의 사고방식 그 자체의 근본적인 모델이 되는 원형(Archetype) 들의 탄생지로, 이곳에서 저절로 굳어서 탄생하는 단단한 금속모형들을 Ego는 손수 집게로 건져내어 금고 속에 보관한다. 그리고 만일 뇌의 전반적인 활동양식을 바꾸고 싶을 때면 Ego는 원하는 금속모형을 잠재의식의 대표자인 Anima에게 빌려준다. 그러면 Anima는 이따금씩 제안서의 내용을 담은 광학적 장치 속의 메시지를 그 금속모형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특정한 패턴으로 전체적인 뇌의 사고방식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몇몇 유명한 수학공식, 과학공식들의 탄생은 바로 그 공식을 발명한 사람의 Ego가 적절한 시기에 그의 잠재의식에 적절한 형태의 금속모형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막강한 위력을 가진 금속모형들이 정확히 어떻게 해서 용암 속에서 만들어지는지는 총 책임자인 Ego 자신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