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바다 위로 불었다. 해는 지평선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저 멀리서는 산들이 그림자를 형성하며 조금씩 윤곽을 보였다. 술렁이는 파도살 위에는 조그만 점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그 점들은 마치 공처럼 부풀어 오른 풍선들이었는데, 그것들은 누군가가 단순히 고무 속에 공기를 불어넣어 만든 것이 아니었다. 표면이 초록색이며 마치 해양생물처럼 갈퀴가 달린 그들은 생명체들이었다.
갈퀴 달린 녹색 풍선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듯, 무리를 지어서 새들처럼 바람을 따라 비행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눈이 곳곳에 달려 있었다 (마치 딸기 표면에 붙은 씨앗들처럼 말이다). 그 눈들을 이용해서 그들은 방향에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이리라. 다만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그들이 시각정보를 인식하냐이다. 그들의 뇌는 미스터리하다. 어떻게 사방에 펼처진 수많은 장면의 파노라마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주변의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피부가 사방에서 오는 모든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녀석은 강렬한 눈빛을 발한다. 거의 수백개에 이르는 눈들을 동시에 발광시키니 마치 백점병에 걸린 뚱뚱한 열대어를 보는 듯하다. 주변에 있던 다른 풍선들은 그의 불빛신호를 해석하기라도 한 듯, 저마다 가지각색의 눈빛을 발하며 거기에 응답한다. 아마도 이들은 다양한 색상의 빛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모양이다. 이들 무리는 한 차례의 강한 바람이 불 때 특히 신경을 곤두세우며 강렬한 눈빛을 교환하는데, 그와 동시에 갈퀴를 세게 휘저으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비행경로를 바꾼다. 사실 이들에게는 독단적으로 비행의 방향을 결정할 만큼 바람에 대항할 힘이 없다. 따라서 이들의 비행은 대부분 “바람을 잘 타는” 능력에 따라 그 행로가 좌우된다.
이들 풍선들에게도 종교가 있는 듯하다. 그들은 아마도 신이 바람을 이용해 자신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고 것이라 믿고 있을 터이다. 왜냐하면 바람이야말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바람이 먹구름들 밑으로 그들을 인도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아까 말했듯이, 그들의 피부는 녹색이다. 그들은 반쯤 식물인 생물들로서, 다른 먹이는 거의 섭취하지 않고 대부분의 영양소를 광합성에 의존한다 (가끔씩 작은 날벌레들이 그들의 몸에 달라붙는 것을 이용해 단백질을 충당하기도 한다). 만약에 바람이 그들을 벌레들이 가득한 정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온화한 지역도 아닌 음침한 황무지로 인도한다면 그것만큼 최악일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풍선 무리들은 어느정도 지리와 기후변화에도 통달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들은 마치 나침반을 달고 있는 것처럼 동서남북을 판단할 수 있고, 해가 떠 있는 시간을 측정해 해당 지역의 계절 또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그들 몸에 붙은 조그만 눈들을 이용해서 멀리 있는 구름들의 움직임을 볼 수도 있다. 최대한 햇볕을 보는 곳에 머물러 있기 위해 이들은 항상 구름이 없는 쪽으로 갈퀴를 내젓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비행방향을 크게 제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바람이 비교적 잠잠할 때는 조금이나마 밝은 쪽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갈퀴를 단순히 휘젓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는다. 갈퀴를 휘젓는 행위는 바람이 아주 약할 때에만 효과를 발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많이 불 때에 그들은 갈퀴를 특정 방향에 거의 수직으로 고정시킨 수, 그것을 뻗뻗하게 굳힌다. 그러면 그것은 마치 배의 돗과도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 바람이 갈퀴를 때리면서 그들의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회전, 또는 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갈퀴들이 마치 접이식 부채처럼 그들 몸의 귀퉁이에 두루루 말려있다 (그들 몸을 양배추 잎처럼 덮지는 않는다. 눈들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바람이 세게 불면 그것들을 펼쳐서 비행방향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따금씩 무리를 지은 풍선들은 자신들의 갈퀴를 손처럼 이용해 서로를 붙잡기도 한다. 그러면 바람에 대항할 돗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대신에, 서로 뭉쳐있기 때문에 대열이 흩어질 위험이 줄어든다. 또한 몸 속이 기체로 가득 차서 몸무게가 터무니없이 가벼운 그들에게 이 행동은 조금이나마 그들을 바람에 휘둘리지 않게 해준다.
이 초록색 풍선들의 비행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그들은 자신의 몸 속에 든 기체의 구성을 바꿈으로써 높낮이를 조절한다. 예컨대 그들에게는 풍선의 속과 밖을 연결해 주는 기관이 하나씩 있다. 그 기관을 이용해서 바깥의 산소를 받아들이거나 내보내기도 하고, 특이한 화학작용을 이용해 헬륨이나 수소를 만들어서 속을 채우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신체적 기능을 자살 폭탄공격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주변에 상당히 위협적인 포식자가 나타나면, 풍선 하나가 무리를 이탈해 갈퀴를 마구 휘저으며 전속력으로 포식자를 향해 날아가며 자신의 몸을 수소로 가득 채운다. 그러면 포식자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입을 벌리며 그 풍선을 잡아먹으려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때 포식자의 이빨이 그를 무는 찰나에 연소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면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포식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풍선 하나의 희생 덕분에 풍선들의 무리가 안전해진 것이다.
사실 이들만 해도 모험가들에 가깝다. 이들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기 위해 몇 마리씩 무리를 지어서 위험천만한 여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행성에 거의 항상 구름 한 점 없는 지역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안정적인 삶을 향유하는 풍선들은 이런 식으로 바람을 따라 날아다니지 않는다. 드넓은 대양이 펼쳐진 몇몇 지역들은 풍선들 사이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일년 내내 비도 한 방울 내리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맑고, 바람은 거의 불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수분섭취를 위한 충분한 양의 물이 밑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황금같은 곳의 하늘은 하나같이 녹색 풍선들의 거대한 무리가 점거하고 있다. 수천만 마리에 육박하는 풍선들은 서로를 꼭 잡은 채, 마치 하나의 구름층처럼 일정한 높이에 떠 있는다. 종종 필요할 때면 그들은 단체로 서서히 내려와 바다를 뒤덮고, 수분섭취가 끝나면 다시 올라와서 공중에 자리잡는다. 이들의 거대한 무리는 하나의 대도시와 다를 바 없는데, 따라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도 장관이다. 밤이 되면 이들은 눈빛으로 가까이 붙어있는 이웃들과 대화를 한다. 이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은하수처럼 선명한 빛의 가루들을 발한다. 이는 한 무리의 별들이 밤마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 모여서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풍선들의 대도시는 하늘 위에 펼쳐진 커다란 녹색 색종이와도 같다. 그들의 무리는 위낙에 방대해서 그 밑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는 해양생물들은 할 수 없이 어두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림자 밑의 물고기들 중 몇몇 적응력 좋은 개체들은 형광빛을 발하며 동료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밤마다 하늘 위뿐만 아니라 바다 속에서도 화려한 빛의 쇼가 펼쳐진다.
풍선들의 도시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도시의 중앙에 위치한 풍선들은 권력자들로, 이들은 사방에서 다른 풍선들이 자신들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다른 이들을 잡을 필요를 못 느낀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갈퀴를 눈빛연설 중 이따금씩 제스처를 할 때 사용한다. 권력자들의 주변에 위치한 풍선들은 다양한 직업의 종사자들로, 이들 중 반 이상은 체내의 기체구성을 조절하여 적당히 도시의 높낮이와 평형을 유지시키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풍선들은 군인들이자 “바람에 대항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허공에 노출된 한쪽 갈퀴를 마구 흔들며, 약간의 미풍에 의해 도시가 다른 지역으로 휩쓸려 가지 않도록 열심히 부채질을 한다. 한마디로 무리의 이동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멀리서 포식자가 다가오면 자살 폭탄공격도 서슴없이 행한다.
풍선들은 자신들의 신체 위에 하나씩 난 작은 꽃을 이용해 번식을 한다. 예컨대 수정된 꽃 속에서는 조금씩 새끼 풍선이 자라나다가, 어느정도 크기가 되면 스스로 꽃을 이탈하고 몸을 가누며 날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도시 풍선의 경우 태어나자마자 주변의 풍선들과 갈퀴를 맞잡는다). 풍선들은 자신들의 내부에 있던 공기를 순간적으로 분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이런 공기의 힘을 이용해 그들은 가끔씩 꽃가루를 사방에 뿌린다. 따라서 가루를 운반해 줄 벌레들이 필요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벌레들이 온다 하더라도 풍선들은 그것들을 잡아먹어 버릴 것이다.
장거리 사격을 위해 풍선들은 자신들의 꽃가루를 얇은 섬유소에 싼 채 발사한다. 그러면 커다란 꽃가루의 뭉치들은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고 꽤 먼 거리에 있는 풍선들에게 떨어지는데, 그 충격으로 섬유소 막은 파괴되고 그 속에 있던 꽃가루가 사방에 퍼진다. 꽃가루는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마치 연기처럼 주변으로 흩뿌려지며 꽃들 위에 착지한다.
물론 도시 속의 풍선들이 다들 평화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종종 풍선들 사이에서는 말다툼도 일어나는데 (‘빛다툼’이라는 말이 아마도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무리 속에는 스스로를 폭파시켜서 주변의 풍선들을 사살하겠다고 위협을 가하는 풍선들이 있기 마련이다. 풍선 하나가 자신의 몸을 수소로 가득 채우는 기색을 보이면, 그를 잡고 있던 풍선들은 재빨리 갈퀴를 놓고 최대한 멀리 흩어진다. 동서남북은 다른 풍선들에 의해 빽빽히 막혀 있으므로, 그들은 되도록이면 공기를 무거운 기체로 바꾸어 아래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는 동안 문제의 풍선은 수소로 몸이 가득 찬 상태라서 너무 가벼워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게 마련이다. 물론 그는 다시 내려와서 무리와 합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려면 우선 폭발의 우려가 있는 수소를 게워내고 산소로 몸을 채워야 한다. 한마디로 무장해제를 해야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돌아온다고 해도 동료들이 그가 내미는 갈퀴를 거부한다면 그는 할 수 없이 허공을 떠도는 방랑자가 되어야 한다. 풍선들의 도시 위에는 그런 식으로 버림을 받은 범죄자 풍선들이 작은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한동안은 이 행성에 단 한 종의 풍선들 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일하게 항상 햇볕만이 내리쬐는 몇 안되는 공간은 죄다 녹색 풍선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관찰 끝에 그것은 오산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느날 한 무리의 분홍색 풍선들이 지평선 너머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은 녹색 풍선들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몇가지 큰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이들의 피부 색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고 (이들은 광합성을 안 한다), 둘째는 이들의 갈퀴가 훨씬 더 힘이 셀 뿐더러 손가락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분홍 풍선들은 자신들의 갈퀴의 각 갈래를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수많은 손모양을 만들어 보일 수 있다. 셋째는 이들이 완벽한 동물성 개체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영양섭취를 햇빛에 의존하지 않는다. 풀을 먹기 때문이다.
거대한 도시를 이루어 한 자리에 머무는 대부분의 녹색 풍선들과는 달리, 분홍 풍선들은 소규모의 부족 사회만을 형성해 무리지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다 (처음에 보았듯이, 녹색 풍선들의 세계에도 소규모 집단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적응력이 약하기 때문에 쉽게 죽는다). 분홍 풍선들이 즐겨찾는 지역은 푸른 풀이 만연한 초원이다. 이런 곳은 먹이를 획득함에 있어서 굉장히 안전한데, 이유는 갑작스러운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에 찔리거나 새들에게 기습을 당할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드넓은 초원을 가 보면 몇몇 분홍 풍선들이 소들처럼 무리를 지어 내려와, 손가락들로 풀들을 잡아 뜯어서 몸 밑에 난 입에 쑤셔넣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입은 마치 맷돌처럼 서로 맞물리며 회전운동을 하는 미세한 이빨바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거친 풀들을 쉽게 갈아서 삼킬 수 있게 해준다. 워낙에 잘게 갈기 떄문에 되새김질은 필요하지 않다.
녹색 풍선과 분홍 풍선 모두 동등한 수준의 지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들 모두 눈에서 뿜는 빛을 이용해 복잡한 의사소통을 하고, 갈퀴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체내 기체의 구성을 마음대로 조종해 높낮이를 제어할 수 있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분홍 풍선들이 훨씬 더 다양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로따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들을 가진 그들은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구를 발명한 듯하다.
분홍 풍선들의 무리를 보면, 그들 중 몇몇은 가늘고 기다란 막대를 허공에다 휘두르며 자신들을 향해 접근하려는 포식자들을 위협한다. 그렇게 생긴 막대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추측하자면, 본홍 풍선들은 자연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약간의 트릭을 통해 재조합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예컨대 갈대의 줄기를 몇 개 겹친 다음, 그것들의 가장자리를 입으로 으깨어서 서로 접착시켰으리라는 것이다. 분홍 풍선의 침에는 접착 성분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꽤 타당성이 있다 (접착성분이 있는 이유는 입이 아래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애써 삼킨 풀이 밑으로 떨어져 버리면 안 되지 않겠는가?).
풍선들이 막대를 들이대면 포식자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친다. 그들에게 있어서 막대 그 자체가 치명적일 리는 없다. 그러나 막대에 발라져 있는 물질이 그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함에는 틀림없다. 그 물질은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알레르기성 반응을 일으키는 어느 한 식물의 점액인데, 이 점액에 접촉하면 온 몸에 독성 물질이 퍼져서 한동안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다. 분홍 풍선들은 점액에 대한 내성을 가진 몇 안되는 종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다른 종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훌륭한 무기로 사용한다. 그들은 아마도 막대를 해당 식물에다 대고 문질렀으리라.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끈적끈적한 검은 반죽을 바르기도 한다. 이 반죽은 아마도 바위 그늘에 핀 버섯을 으깨어 만든 걸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독성 반응은 없지만 냄새가 고약하기 때문에 포식자들이 피한다. 반죽은 체내에서 나오는 땀 비슷한 물질로 영양분을 충당하며 계속해서 자라나는데, 이로써 분홍 풍선과 버섯반죽은 서로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분홍 풍선들은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아무 풀이나 잘 뜯어먹는다. 이런 식성때문에 그들은 이따금씩 녹색 풍선들의 무리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다만 그러한 도전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유는 분홍 풍선들의 공격체계와 방어체계가 식물 계통의 적들에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점액을 바른 막대는 동물들에게만 유효할 뿐, 식물들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 버섯반죽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녹색 풍선들은 빛을 이용한 대화가 수월하지 않다 싶으면 스스로를 폭발시켜서 분홍 풍선들을 공격한다.
앞서 보았듯이, 분홍 풍선들은 녹색 풍선들보다 특출나게 강하지 않다. 오히려 녹색 풍선들이 대도시를 만들어서 훨씬 더 풍족한 사회생활을 누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유로운 손가락들을 가진 분홍 풍선들의 기술적 도전은 단순한 공격이나 방어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실험정신이 강한 종이라서, 시시때때로 자연을 이용한 다양한 시도를 하곤 한다. 풀을 먹지 않을 때면 그들은 무리를 지어서 초원 한복판에 놓인 바위의 움푹 파인 곳에 자리잡는다. 그런 다음 비바람이 스며들지 않도록 커다란 나뭇잎들을 연결하여 둥근 지붕을 만든 뒤, 그것을 바위 위에 고정시킨다. 그러면 외부과 격리된 하나의 밀폐된 공간이 탄생하는데, 여기서 바위 위의 파인 부분은 실험물질을 테스트하기 위한 그릇역할을 한다. 분홍 풍선들은 다양한 식물 종들의 즙을 채집하여 그 자그마한 돌그릇 안에서 조합해 본다. 그리고는 짧은 막대로 그 조합물을 찍어서 바깥에 있는 다양한 동식물들에게 갖다 대며 반응을 실험한다.
분홍 풍선들은 이러한 실험 결과를 기록할 방법 또한 찾아내었다. 그들은 시멘트 비슷한 반죽을 잉크 삼아서 바위 위에 글을 쓰는데, 여기서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언어는 아마도 그들이 대화할 때 사용하는 빛 신호를 기호화한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수준 높은 문명을 창조한 분홍 풍선들이 아직까지 대규모 모듬살이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다. 문자마저 발명한 이들이 왜 농업기술은 터득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너무 떠돌이 생활에 쉽게 적응해서가 아닐까? 밤중에는 포식자들의 위협을 피해 거처를 찾아야 하는 인간들과는 달리, 이들은 딱히 고정된 거주지가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풍선들은 자신이 위험상황에 처해 있다 싶으면 언제든지 위로 붕 뜨면 되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높이까지 올라가면 제 아무리 높게 날 줄 아는 조류도 감히 다가가지 못한다.
풍선들에게는 한가지 본능적인 믿음이 있다. “높은 곳에 있으면 안식을 취할 수 있다”가 그것이다. 그들은 휴식이 필요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스스로를 가벼운 기체로 채워넣어 위로 붕 띄어 올린다. 하늘의 아주 높은 곳까지도 도달할 수 있는 그들은 이따금씩 사방에 펼쳐진 지구의 경치를 바라보며 사색에 젖기도 하는데, 아마도 그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니까 지구도 조그만 땅덩어리에 불구하구나.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그곳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그리하여 그들은 농업이나 기계기술을 발명하기도 전에 우주개발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풍선들에게 있어서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영원한 평온을 찾아 떠나는 여정과도 같이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선들은 자연상태에서는 우주공간까지 올라갈 엄두를 못 냈음에 틀림없다. 대기권의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기압차이로 인해 팽창감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별다른 기술이 없는 녹색 풍선들에게 있어서 우주는 영원히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분홍 풍선들에게는 도구를 다룰 줄 아는 손가락들과 실험정신이 있었다. 그들은 우주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단단한 물질로 자신들의 몸을 둘러싸야 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야 몸의 팽창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처음에 그들은 커다란 시멘트 반죽그릇을 마련해 놓고는, 가벼운 기체로 몸을 가득 채운 동료를 반죽 속에 푹 담구었다. 그 풍선은 온 몸이 시멘트 범벅이 되었지만, 몸 속에 가득 찬 수소 덕분에 반죽을 뚫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기에 노출되자 반죽은 조금씩 굳기 시작했고, 그렇게 최초의 풍선 우주비행사는 단단한 회색 우주복을 입은 채 하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 몸이 시멘트 반죽으로 밀폐된 그는 곧 호흡곤란을 느꼈을 것이다. 고통을 못 이긴 그는 스스로를 폭발시킴으로서 자살을 택했다. 최초의 우주탐사는 그렇게 한 풍선의 죽음으로 끝이 났고, 그때부터 분홍 풍선들은 우주를 개척하는 게 목숨을 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분홍 풍선들은 실험을 계속했다. 그들은 불을 이용해 금속을 추출하려고 노력했고, 단단한 물질로 우주선을 만들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터무니없이 가벼운 풍선들에 불과했고, 따라서 무거운 재료들을 운반하거나 조립할 충분한 근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땅바닥에 자신들의 몸을 단단히 고정시킬 다리가 필요했고, 먼 곳까지 뻗을 수 있는 팔이 필요했으며, 자신들로 하여금 무엇이든지 거뜬히 해낼 수 있게 해줄 힘센 근육들이 필요했다. 결국 분홍 풍선들은 자신들이 아직 우주탐사를 꿈꾸기에는 덜 진화된 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자신들이 충분한 신체적 힘을 가지도록 진화할 때까지 천만년 이상의 세월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 분홍 풍선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유행이 불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손가락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가늠하기 위한 손가락 씨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씨름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진화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곧 힘이 센 풍선은 “정치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힘이 약한 풍선은 실험정신이나 도전정신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져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회 풍조는 분홍 풍선들로 하여금 과학실험은 중단하고 근력운동에만 주력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신체적 미를 향한 그들의 숭배사상이 진정으로 과학적 지성과 공생할 수 있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