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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과 주기 - 1

Author: Youngjin Kang

Date: Autumn 2013

사물은 각자 자기 고유의 지평 위에서 움직이는데, 때로는 지평과 지평이 만나는 교차점인 "장소"에서 또다른 지평에 속한 사물과 맞딱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 지평에 속해 있던 사물이 또다른 지평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맞딱뜨림은 "사건"이라고 하며, 사건은 그 사건을 있게 해준 기존의 경로들을 가지고 새로운 경로들을 창조해내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서 A지평과 B지평이 교차하는 지점을 AB장소라고 가정해 보자. 어느날 A지평의 어딘가에서 시작해 AB장소에서 끝나는 경로가 하나 있고, B지평의 어딘가에서 시작해 AB장소에서 끝나는 경로가 또 하나 있다. 이는 즉, A지평에 속한 경로 하나와 B지평에 속한 경로 하나가 AB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에 휘말렸다는 이야기이다. 본 사건은 방금 전에 명시했던 2개의 경로들을 입력값으로 받아들인 다음, 각각 A지평과 B지평에 속한 2개의 또다른 경로들을 출력값으로 배출해 낼 것이다.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설명하자면, A지평에 속한 기존의 경로는 AB장소를 지나자 똑같이 A지평에 속한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냈고, B지평에 속한 기존의 경로는 AB장소를 지나자 똑같이 B지평에 속한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냈다. 결국, 2개의 본래 경로들이 한 장소에서 만남으로써 2개의 새로운 경로들을 창조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경로에 속해 있던 사물과 새로운 경로에 속하는 사물은 서로 조금씩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겠지만, 둘 다 똑같은 지평에 속해 있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지평에 속한 사물들은 [같은 사물]로 정의된다" 라고 약속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던 빈 지평 상에서 경로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원초적인 힘은 무엇일까? 우선 경로라는 것은 "사물이 이동한 흔적"을 나타냄을 유념해야 한다. 경로가 발생하려면 일단 사물이 탄생해야 한다. 일단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자. 바다의 지평선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선 바다가 있는데, 만약에 그 바다가 너무 잠잠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다(지평)는 아무런 동요가 일체 없는 평온 속에 잠들어 있을 것이며, 그 곳에서는 아무런 사물도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바다가 춤을 추며 마구 요동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닷물이 마구 뒤틀리기 시작하면서,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흰 거품이 마구 발생하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바다 위를 감싸고 있던 바람 또한 파도와 함께 뒤흔들리며 조그만 소용돌이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사소한 것들, 예컨대 거품이나 바람같은 것들도 엄밀히 따지면 아무것도 없던 바다 위에서 탄생한 사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바다의 표면이 일직선으로 뻗어있을 때에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다가, 표면이 파동의 형태로 요동치니까 그 파동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사물들, 그리고 아울러 그 사물들의 이동이 만들어내는 "경로"들이 덩달아 발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리해 보자면, 지평이라는 것은 각각 독립적으로 요동치는 파도와도 같다고 단정지어 볼 수 있다. 지평이 만들어내는 파동의 형태를 조사해 보면, 그 지평에 속한 경로들의 종류는 파동의 진폭(Amplitude)과 주기(Period)에 의해 정의되는 두가지의 변수들로 표현될 수 있다. 진폭은 경로의 강도(Intensity)인 반면에, 주기는 경로가 한번씩 발생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다. 주기가 짧을수록 경로는 자주 발생한다.

A와 B라는 두 개의 지평들이 서로 교차하여 AB장소를 만들고 있다고 치자. A지평의 주기는 2이고, B지평의 주기는 10이다. 또한, A지평의 강도는 3이고, B지평의 강도는 2이다. 자, 여기서 AB장소가 무슨 사건을 일으키는지를 시험해 보자. A지평과 B지평의 주기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A지평에 속한 사물과 B지평에 속한 사물이 서로 동시에 AB장소에 도달하는 시간은 A지평과 B지평의 주기들 사이의 최소공배수인 10이다. A지평에 속한 사물이 AB장소를 4번 지나친 다음에야 두 지평에 각각 속한 2개의 사물들이 서로 동시에 AB장소를 한번 지나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