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작은 공간 속에 점점 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있다.
테라바이트 단위의 하드디스크는 이미 조그만 수첩 크기가 된지 오래이고, 엄지손가락 만한 USB는 이미 수십 기가바이트를 담을 수 있게 된지 오래이다. 물론 반도체의 정밀성을 아무리 높인다 해도 필요한 원자의 최소 갯수에 따른 한계치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몇몇 기업과 연구기관들은 여러 층의 레이어로 이루어진 직접회로, 주름 형태의 트랜지스터, 크리스탈을 이용한 저장장치, 또는 생물의 유전자를 이용한 저장장치 등의 색다른 테크닉들을 시도하며 계속해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공간을 줄이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미지 출처: fineartamerica: https://fineartamerica.com/featured/computer-memory-chips-tilen-hrovatic.html)
이런 추세대로라면 머지 않아 조그만 모래 알갱이 크기의 결정체 안에 최소 수십 페타바이트의 데이터를 담는 게 가능해 질지도 모른다 (분자 단위로 비트를 저장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만약에 미래에 인류가 메모리 기술에 있어서 그 정도의 발전을 이룩한다면, 이는 게임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선은 CPU나 GPU를 비롯한 연산장치의 속도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기술에 발전함에 따라 컴퓨터의 동시 연산량과 연산속도가 좀 더 빨라지기는 하겠지만, 그 발전의 정도가 메모리 기술의 놀라운 발전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한다.
메모리 공간의 어마어마해진 효율은 지금껏 없던 새로운 장르의 게임들을 탄생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메모리 공간의 부족 때문에 시도해 보지 못했던 게임 속 요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Archaeology at Brown: https://blogs.brown.edu/archaeology/workshops/playing-the-past/)
예컨대 절차적 알고리즘이나 네트워킹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순수히 사람이 디자인한 태양계 크기의 세계 속에서 탐험을 하는 게임이라던가, 아니면 거대한 유적지 한복판에서 모래 알갱이 단위로 미세하게 땅을 파헤치며 유적을 발굴하는 일종의 "고고학자 시뮬레이터" 게임이라던가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와 후자 둘 다 방대한 양의 메모리 공간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가정용 컴퓨터에서 실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메모리 기술의 발전에 그 무엇보다도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분야는 바로 3D 게임 그래픽 기술이 아닐까 싶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3D게임은 폴리곤(Polygon) 기술을 바탕으로 작동되고 있다. 폴리곤 기술이란, 게임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들을 꼭지점과 평면들로 이루어진 3차원 입체도형으로 구현하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Incredible Graphics: https://graficsweb.wordpress.com/2016/11/09/polygon-graphics/)
폴리곤 기술이 널리 쓰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메모리 공간을 그닥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각의 사물을 표현하려고 할 때는 단순히 사물의 겉 표면을 이루는 꼭지점들의 위치와 그것들 사이의 상관관계, 그리고 표면에 입혀질 UV맵의 기준 좌표 정도만 알면 되기 때문에, 게임 속에 존재하는 꽤나 방대한 3차원 세계를 일련의 매시(mesh)들과 그것들 사이의 상관관계로 표현하여 디스크에 저장했을 때 차지하는 총 데이터의 양이 그닥 많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메모리 공간의 효율성이 지금의 약 1억배 정도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동일한 질량의 저장장치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안에 각각의 3차원 사물을 단순한 꼭지점/면들과 텍스쳐의 집합이 아닌 미세한 "알갱이"들의 모임으로 표현하여 저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한마디로 사물을 단순한 입체도형이 아닌,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분해할 수 있는 입자들의 뭉치로 구현해 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