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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분류학

Author: Youngjin Kang

Date: Autumn 2012

생물학에 생물분류학이 있듯이, 산업학에는 사물분류학이 있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평소 생활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소지품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점찍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생물이 몇몇 단세포 수준의 유기체들로 시작해서 점차 다세포로 진화해 갔듯이, 사물들도 처음에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돌덩어리나 나뭇가지 막대를 기점으로 해서 멋 훗날에는 컴퓨터, 인공위성 같은 도구로 진화해 갔다. 생물분류학자들은 현존하는 생물들과 화석자료들을 참조하여 생물진화의 도표를 그리곤 한다. 예컨대 위아래가 뒤집힌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각각의 나뭇가지는 생명체의 종을 뜻하고, 나뭇가지가 두어갈래로 갈라지는 것은 하나의 종이 다른 몇가지의 새로운 종들로 갈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밑으로 갈수록 나뭇가지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며, 그만큼 생물들도 다양해진다. 그래프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이 수많은 종들의 궁극적인 조상들을 찾을 수 있고, 더 위로 올라가면 그 조상들의 조상 생명체를 찾을 수 있으며, 완전히 위로 올라가면 현존하는 모든 생물체의 시초가 된 공통된 조상, 즉 나무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도구들도 이런 식으로 진화해 왔고, 따라서 (비록 무생물들이긴 하지만) 그들도 하나의 종이 위에 나무모양의 도표로 분류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정도 생물분류표를 작성할 때와 비슷하다. 과거에 있었던 사물들은 옛 문서들이나 땅속에 묻힌 유물들을 참조하여 조사하고, 현존하는 사물들은 인터넷으로 일일히 조회해 보거나 산업규격협회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를 활용하여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모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과거에 존재했거나,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인류의 모든 도구들에 대한 정보를 한데 모을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시간대와 탄생순서를 참조하면서 도구들을 나무모양 도표의 알맞은 부위에 기입하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돌망치나 부싯돌같은 석기시대의 발명품들은 거의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는 윗부분에 위치시키고, 그와 반대로 가장 최근에 발명된 최첨단 기기들은 나뭇가지들의 끝에 해당하는 밑부분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물론 크리스탈 잔이나 시멘트 벽돌이나 인쇄기구같이 중세/르네상스 쯤에 발명된 것들은 나무의 중간정도 위치에 놓으면 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생물을 분류할 때 생물의 진화방향을 고려하여 무슨무슨 생물들로부터 무슨무슨 생물들이 탄생한 것인지에 대한 유전적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듯이, 사물을 분류할 때도 각각의 사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슨무슨 사물의 발명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생물의 진화에는 유전적 전후관계가 있듯이, 사물의 진화에는 기술적 전후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디지털 시계를 예로 들어보자. 가장 먼저 할 일은 디지털 시계가 어떤 나뭇가지에 속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인데, 그럴려면 디지털 시계의 직계조상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는 3가지의 후보가 있다. 하나는 아날로그 시계이고, 또 하나는 전자회로이며, 마지막 하나는 녹색 액정이다. 언뜻 떠오르는 “직계조상”의 후보가 3가지나 되니까 헷갈릴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이들 후보 중에서 가장 디지털 시계와 닮은 사물은 무엇인가? 당연히 아날로그 시계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날로그 시계야말로 디지털 시계의 발명을 유도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날로그 시계를 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디지털 시계를 발명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날로그 시계야말로 디지털 시계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유도한 프로토타입, 즉 모델인 것이다. 다른 2가지의 후보들인 전자회로와 녹색 액정은 물론 디지털 시계의 발명에 필수적인 존재들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 사물분류학의 나무 한복판에 위치시킬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는 “도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전자회로나 녹색 액정은 도구 그 자체가 아니라, 도구를 만들 때에 쓰이는 재료 또는 부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물로 따지면 유전자들과도 같다. 코뿔소와 황소가 둘다 뿔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이 생물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코뿔소와 황소의 공통된 조상이 “뿔”이라는 이름의 생명체라고 결론내리기는 더더욱이나 어렵다. 뿔은 유전적 특성일 뿐,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생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분류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완성된 도구들만을 도표 안에 그려넣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다리미, 냉장고, 전등 (전구는 아니다. 전구는 도구가 아니라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에 도표 안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드릴, 포크레인, 비행기, 진공청소기 같이 당장에 어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것들만 도표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알루미늄 캔은 하나의 도구로 인정되기 때문에 도표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알루미늄 자체는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에 도표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컴퓨터는 도표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컴퓨터의 LCD 스크린은 도표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자동차는 도표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자동차의 엔진이나 유리창이나 와이퍼, 바퀴, 배기통 같은 것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면 쓸모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재료로 간주되며, 따라서 도표에 들어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휴대폰은 도표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휴대폰에 장착하는 배터리는 단순히 휴대폰에게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부속품일 뿐이므로 (배터리 그 자체가 도구는 아니므로) 도표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진짜 도구들만을 잘 추려내면서 사물분류표를 만들다 보면, 과거부터 시작해서 산업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즉 어떤 발명품에서 어떤 발명품이 파생되었으며, 이 발명품이 다른 무슨 발명품을 토대로 만들어졌는지, 또는 저 발명품은 사물진화의 무슨 선 상에 있는지를 하나의 그래프로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류표를 잘 분석하다 보면, 미래에 무슨 발명품들이 등장할 것인지를 미리 점쳐볼 수도 있다. 또한 동일한 시대의 발명품들이 각각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했는지도 역사적인 자료를 토대로 확인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