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편집할 줄 아는 책이 있다면 어떨까? 우선 스스로를 편집할 줄 안다고 가정한다면, 그 책은 아마도 생각과 자아를 가졌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책 속의 내용을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고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었다 한들, 수동적인 일련의 연산작용만 가지고는 인간의 복잡한 사유력을 글로 승화시킨 페이지들을 유연하게 뜯어고치는 일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를 편집하는 책들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
도서관의 자서전 코너에는, 항상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편집하는 기이한 책이 하나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회고록을 담고 있는 두껍고 붉은 책인데, 그 책의 일생 최대의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펼쳐보거나 대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서관의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여져야 했고, 내용이 아주 흥미진진해야 했다. 내용을 재미있게 바꾸는 방법은 간단하다. 책은 자신의 의지만을 가지고도 자기 몸을 이루는 페이지 하나하나의 모든 문장들을 뜯어 고칠 수 있다. 크게는 전체적인 문맥에서, 작게는 철자 한 두 글자까지 말이다. 지금은 회고록으로써 자서전 코너에서 활약하고 있는 붉은 책도 왕년에는 초현대주의에 관련된 에세이였고, 한동안은 스웨덴 미술사에 관한 책이었으며, 또 바로 최근에는 주석달린 피너츠 만화 콜렉션이었다. 이토록 자주 수정을 거듭한 것은 전적으로 최대한 많은 방문객들에게 자신을 읽히기 위해서였으며, 따라서 붉은 책은 스스로를 수정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그도 어느 누군가에 의해 쓰여진 책에 불과했지만 (처음에 그는 C++ 프로그래밍 서적이었다), 점차 주변에서 영혼을 빨아들이면서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한 그는 점점 더 많은 인기몰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완벽한 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들 만한 한가지 의문점을 바로, 왜 그는 온통 유머로만 가득 차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온전히 재미위주인 책으로 스스로를 탈바꿈시키지 않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책의 내용이 바뀌면 그 책에 붙은 도서관용 일련번호도 바뀌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미학에 관련된 학구적인 내용이 많아지면 700번대로 바뀌고, 현대문화에 관련된 주관적인 내용이 많아지면 300번대로 바뀐다). 일련번호가 바뀌면 도서관에서 자신이 꽂혀 있어야 할 자리도 변하기 나름이다. 그 자리는 도서관의 구석이 될 수도 있고, 정 중앙이 될 수도 있으며, 어중간한 위치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책은 자신이 수정한 내용이 일련번호에 어떤 파격을 미칠지도 생각해야 한다. 실수로 테마를 잘못 정했다가는 정부문서 코너나 주소록 코너같은 외로운 자들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현재 회고록으로 활약하고 있는 붉은 책은, 그나마 붉은 색과 두꺼운 두께 덕분에 사람들에게 자주 눈에 띄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그를 책장에서 뽑아내서 펼쳐 보는 경우는 아주 드물며, 그는 이제 따뜻한 손길에 의해 스스로가 펼쳐지는 순간만을 매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데 신물이 나 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다른 책들이 미쳐 하지 못했던 위대한 시도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 바로 지금까지 그 어떤 책도 담지 못했던 새로운 장르의 내용으로 스스로를 수정해서, 도서관에 새로운 코너를 만들어놓고 그곳을 혼자서 차지하는 것이다. 그거야말로 모든 이들의 이목을 확실하게 끌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는 이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매일매일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는 데에 열중했다.
물론 다른 그 어떤 책들과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되는 혁명적인 글을 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붉은 책은 현재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회고록을 어떤 식으로 손봐야 “새로운 장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냥 무턱대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지어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랬다가는 일련번호가 이상하게 바뀌어서 싸구려 3류 소설책들 사이에 끼여버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을 수정하는 데에는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붉은 책은 자신을 지금까지는 없었던 아주 색다른 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밤을 지새며 고민했으며, 다른 책들은 그의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비아냥거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붉은 책은 지금까지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던 선구적인 책들을 예로 들며 (예를 들자면 SF 코미디를 창시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님을 거듭 주장했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한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그건 바로 새로운 학문을 창조한 다음, 그 학문을 소개하는 책으로 스스로를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왜 하필 “학문”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학구적인 글만을 담아야만 자칫 문학작품으로 오인되어서 소설책들 사이에 끼여버릴 위험을 방지해주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가 발명한 학문들 중에는 몇가지 참신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첫번째는 “개념학”으로,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개념들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무언가를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숫자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숫자”는 개념학에서 연구해야 할 수많은 개념들 중에 하나이다. 이 밖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하기 위해 줄곧 떠올리는 패턴들, 예를 들자면 축, 회전, 격자, 이동, 직선, 곡선, 방향, 원, 승강, 증가, 감소 등의 온갖 추상적인 “생각의 원형”들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개념학이다. 불행하게도 스스로를 이러한 내용으로 수정한 붉은 책은 이틀 뒤 철학 코너의 한 귀퉁이로 처박혀 버리고 말았다.
두번째는 “사물역학”으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물건들 (예를 들자면 세탁기, 냉장고, TV 등) 이 서로와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고, 그러한 연관관계가 그 물건들을 이용하는 사용자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서 방 안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는 TV를 켜는 것과, 세탁기의 바로 옆에 놓여있는 TV를 켜는 것에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바로 사물역학에서 하는 일이다. 불행하게도 스스로를 이런 내용으로 수정한 붉은 책은 이틀 뒤 미신관련 코너의 풍수지리 책들 사이로 옮겨졌다.
세번째에도, 네번째에도, 다섯번째에도, 붉은 책은 계속해서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는 실험을 거듭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전보다 내용이 생소해져서 그를 펼쳐보려는 사람들도 뜸해졌다. 그러나 온갖 코너의 구석들을 누비며 소외된 생활을 하면서도 붉은 책은 창조활동에 불을 지폈고, 어느날 그는 종이짝이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