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격차가 커질수록 분쟁은 늘어난다. 이는 도시와 같은 인구과밀의 지역에서 크게 두드러지는데, 따라서 도시계획자들은 예로부터 그러한 현상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다만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가상의 신분을 만들어 시민들을 나누고, 그렇게 인위적으로 정한 신분을 기반으로 그들의 삶을 통제해 평화를 도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겨져 왔다. 결국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시민들의 신분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나눌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방식이란 바로 물질적인 장벽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도시의 한 시민으로서 지금 연옥의 한복판을 걷고 있다. 이곳은 그리 나쁜 곳이 아니다. 그닥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곳은 도시의 중심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밋밋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사방에 바둑판식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 사이에는 밋밋한 회색 아스팔트 도로가 총 4차선 규모로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밋밋한 주황빛이었고, 거리 곳곳에는 가로수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사는 연옥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고 따분한 곳이다.
그러나 연옥은 도시의 일부에 불과하다. 연옥의 한복판에는 경비가 삼엄하고 가장 높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 건물 안에는 엘리베이터가 하나 있다. 그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도시의 다른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예컨대 이 도시에는 총 3개의 구역들이 있는데, 각각의 구역들은 위아래로 층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려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 합법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던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천장이나 바닥을 뚫어서 통과해야 한다 (이는 중죄일 뿐만 아니라 거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층과 층 사이의 장벽은 단단한 금속과 접착성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설사 속임수를 써서 다른 구역으로 간다 하더라도, 신분이 안 맞는 곳에 적응해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곳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신분에 맞는 곳에서 잔말 말고 사는 것이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는 가장 최선의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도시에서 시행하는 ‘공간적 신분제’에 토를 달지 않았다.
연옥은 가장 위층인 천국과 가장 아래층인 지옥 사이에 끼여있는 구역이다. 이곳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지옥으로, 올라가면 천국으로 가는 것이다. 도시의 각 구역은 신분에 따라서만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구역은 나름의 기능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가장 위층에 자리잡은 천국은 부유한 자들의 풍요로운 주거구역과 질 좋은 교육시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술이나 순수학문의 창작, 또는 연구에 종사한다. 천국 주민들의 신분은 ‘천사’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가장 아래층에 자리잡은 지옥은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컨대 지옥의 주민들은 지하수를 퍼올려 위층에 식수를 공급했고, 하루종일 인공태양을 켠 채로 빽빽한 서랍식 농장에 농작물을 재배했으며, 축산업과 수산업에도 임했다. 또한 인공태양으로 길러낸 나무로 목재를 만들고, 광산을 파 금속을 만들었다. 이렇게 모인 재료들은 가공을 거쳐 소비품으로 거듭나기 위해 연옥으로 보내졌다. 지옥의 주민들이 유일하게 위부에서 공급받는 에너지는 전력으로, 이는 도시 밖을 둘러싼 거대한 황무지에 펼쳐진 태양열 전지판과 풍력발전기가 만들어서 보내주는 것이다. 나머지 1차 산업은 죄다 지옥에서 담당하는데, 곳곳에서 작동하는 인공태양의 복사열 때문에 지옥은 항상 사우나같이 후텁지근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전력을 최대한 아껴야 하기 때문에 양식장과 농장을 제외한 공간에는 에어컨을 설치하지 못한다. 같은 이유 때문에 지옥은 항상 어두침침한다. 왜냐하면 전력을 아끼기 위해서는 조명을 켜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도시의 각 구역마다 전력 소모량에 제한을 부여하는데, 지옥은 가장 제한이 많기 때문에 전기를 최대한 아껴야 한다. 연옥은 제한이 조금 있고, 천국은 거의 제한이 없다). 지옥 주민들의 신분은 ‘악마’라 불리는데, 이런 명칭에는 주민들 스스로도 동의하고 있다. 덥고 어두운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천사의 노릇은 아니지 않는가?
이 거대한 도시에서 내가 속한 구역은 바로 2층, 연옥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인 이곳은 가장 “평균적인” 삶을 살며 가장 “평균적인” 일에 종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전력도 가장 평균적인 양으로 공급받는데, 이 때문에 연옥의 천장에는 정확하게 중간 밝기의 조명들이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다. 이곳의 경치는 마치 해질녘의 노을과도 같아서, 나름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노을빛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오로지 위층을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는 길쭉길쭉한 콘크리트 건물들 뿐이다. 문제는 낮과 밤이 없고 항상 이 해질녘만이 반복된다는 것인데, 나는 정부가 왜 전력낭비를 감소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을 제공하지 않는지 알고 있다. 이는 평생동안 연옥의 주민들을 중간 밝기의 불빛 아래에서만 살 수 있도록 길들이기 위함이다. 이런 인공적인 환경에서 살던 연옥의 주민은 감히 도시의 다른 구역을 침범할 생각을 못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항상 미적지근한 주황빛 하늘만을 바라보던 연옥 주민이 어떻게 밝고 화창한 천국의 하늘을 눈 뜨고 바라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천국에 발을 디디자마자 실명할지도 모른다. 지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지근한 공기와 불빛에 길들여진 연옥의 주민이 무슨 수로 지옥의 타는 듯한 더위와 어둠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그 누구도 지옥으로 내려갔다가는 단번에 일사병 걸린 야맹증 환자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길들임 때문에 우리 도시의 시민들은 서로 다른 구역을 침범할 생각을 일체 못한다. 나는 연옥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연옥의 미지근함만을 견딜 수 있다. 천국의 밝음도, 지옥의 어두움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의 숙명은 어중간한 곳에서 살다가 어중간한 곳에서 죽는 것이다. 물론 연옥의 주민들은 일년 365일 계속되는 주황빛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지는 않아도 된다. 그들에게도 천국이나 지옥의 주민들처럼 나름 종사해야 하는 일이 있다. 평소에 우리 연옥인들은 건물 안의 사무실에서 계산기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사무일을 하거나, 아니면 공장에서 일하며 생산업을 도맡는다. 지옥이 1차 산업, 천국이 3차 산업에 종사한다면, 연옥은 바로 2차 산업에 종사하는 셈이다. 다행히도 연옥의 하늘은 예전의 산업화된 도시들처럼 공해의 위협은 없었다. 공장의 굴뚝들은 벽을 뚫고 도시 밖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3층짜리 건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다만 그 규모가 크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층과 층 사이의 높이는 실내 놀이공원보다 조금 더 크고, 도시 전체의 너비는 뉴욕 시의 3배에 육박한다. 따라서 고층건물이 없어도 주민들에게는 살 공간이 꽤나 방대한 셈이다. 지옥은 지하에, 연옥은 지상 1층에, 그리고 천국은 지상 2층에 위치해 있다. 모든 층은 천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공간들인데, 이 때문에 벽면에 설치된 환풍기나 에어컨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환기를 시켜준다. 물론 층과 층 사이로는 공기는 커녕 전파의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시의 각 구역은 서로에게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규율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의 시민들 중 극소수의 몇명은 구역들을 때때로 넘나들 수 있다. 바로 정부관계자들이다. 이들은 도시의 정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초고층건물 안에서 생활하며 업무를 보는데, 이 건물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세 구역들 모두를 관통하는 건축물이다. 건물의 위쪽 끝은 천국의 천장에 닿아 있으며, 건물의 아래쪽 끝은 지옥의 바닥에 닿아있다. 한마디로 정부관계자들의 건물은 척추처럼 도시의 머리와 발을 이어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정부에서 일하지 않는 자들은 절대로 이 건물에 출입할 수 없다). 이 건물은 보통 “관제탑” 또는 “관리탑”으로 불리는데, 실제로 이곳에서 일하는 관계자들은 “관리자”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들은 도시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술적인 문제들을 주로 해결한다. 예를 들자면 도시의 천장이나 벽의 파손된 부분을 복구할 때, 또는 도시 밖의 황무지에 설치된 발전기들 중 말썽을 부리는 놈을 고칠 때 이들이 직접 나선다. 또한 정부 관계자들은 지옥에서 생산한 식료품이나 재료들을 모은 다음 연옥의 주민들에게 공급하고, 연옥에서 가공된 물품들을 천국에 공급하며, 범죄를 저지른 주민들을 처벌하는 일도 한다. 어쩌면 관리자들은 그나마 가장 높은 자유를 만끽함과 동시에 가장 바쁘게 일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에게는 신분이 있지만 (천사, 연옥인, 또는 악마), 그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족보도, 가족관계도, 학력도, 돈도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자신이 어디에 사는지만 알면 되는 것이다. 도시의 맨 위층에 살고 있다면 천사이고, 그 중간층에 살고 있다면 연옥인이며, 지하에 살고 있다면 악마이다. 이러한 공간적 구분은 너무나도 또렷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신분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날 수가 없다. 평생 서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