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의 수를 한정시키는 요소는, 역설적이게도 무한의 속성 속에 숨어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고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한번쯤 생각해 보면 수학적 사유에 도움이 될까 싶어 소개해 보도록 한다. 다시 말하건데, 지금 말할 내용은 무한의 개념을 다루고 있고 지극히 이론적이기 때문에 사고보다는 직감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한한 크기의 공간과 시간을 가진 어항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어항은 말 그대로 크기가 무궁무진하게 커서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며, 절대로 파괴되거나 손상되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영원불멸하다. 또한 이 어항의 내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상태인데, 이는 중력장이나 전자기장 같은 힘마저 눈꼽만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야말로 어항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비어있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결국 이 어항은 무한히 크고, 무한한 시간동안 존재하며, 그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어항 속에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그 어떤 종류의 사물을 갑작스럽게 탄생하거나 소멸할 수 있다. 예컨대 어항의 어딘가에서 어느 순간 밤색의 스타벅스 1호점 커피잔이 갑자기 나타나서 유유히 날아다니다가, 정확히 5초 뒤에 사라지는 등의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항 속에서 탄생할 수 있는 사물의 종류는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또는 상상도 못하는) 모든 종류의 사물은 항상 어항 속에서 아무 위치와 시간에서나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 어항은 무한히 넓기 때문에, 항상 "어딘가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초속 79바퀴씩 적도를 중심으로 회전하며 정지해 있을 수도 있고, 코끼리 뿔을 조각해 만든 고양이 모형이 시속 920km로 어항의 아래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샌드위치에 넣으려다가 실수로 빠진 채 분홍색 곰팡이가 살짝 낀 상태로 4시간동안 방치된 양상추 조각이 초속 2m로 원운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가설을 제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어항 그 자체를 하나의 사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어항 속을 이루는 사물들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니까 어항 그 자체도 무한한 수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어항의 범위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무한한 종류의 사물들이 무한한 수의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만약에 어항 그 자체를 하나의 사물로 가정한다 하더라도, 정말로 어항이 취할 수 있는 종류의 가지 수가 무한할까? 일단 어항을 이루는 공간의 범위가 유한하다는 전제 하에서 생각해 보자. 일단 가로/세로의 길이가 각각 10m씩인 정육면체 모양의 어항이 하나 있다고 치자. 나머지 조건은 처음 말했던 것들과 동일하다. 어항 속의 시간은 무한하며, 어항은 완벽하게 비어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어항 속에는 그 어떤 종류의 사물도 아무런 구속 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자, 이제 이 어항의 한가운데에 도자기 찻잔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찻잔은 제자리에 완벽하게 정지해 있으며, 아무런 변형도 없는 온전한 모습으로 무한한 시간동안 그 자리에만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어항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의 종류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0에 수렴하는 찰나의 시간동안 무한한 속도로 질주하다가 소멸하는 사물이 있는가 하면, 무한한 시간동안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사물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하나 생긴다. 아까도 말했듯이, 어항의 내부는 무한한 종류의 상태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항 속에는 무한한 숫자와 종류의 사물들이 언제 어디에서든지 나타날 수도 있고, 소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금 말한 도자기 찻잔은 이러한 전제를 깡그리 부숴 버린다. 찻잔이 어항 한복판에서 항상 버티고 있는 한, 어항은 자기 내부에 아무리 다양한 종류의 사물들을 출현시킨다 한들 찻잔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냐면, 이 어항은 설사 무한한 시간이 흐른다 할지라도 절대로 "한가운데에 찻잔이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어항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어항이 취할 수 있는 형태의 종류는 "유한하다".
어항의 크기가 무한하다 할지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무한한 공간이라 해도, 거기에다가 좌표를 더하면 중심점이 탄생하기 마련이며, 그곳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진 위치라 할지라도 (무지막지하게 큰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좌표의 원점으로부터의 거리가 무한에 수렴하는 한 위치는 "10의 9000000000제곱"과 같은 어마어마한 양으로 나타낼 수 있다.
크기가 무한한 어항이 하나 있고, 그 어항 속에 자리잡고 있는 좌표의 원점을 그 어항의 "중심"이라고 가정해 보자. 만약에 아까 말했던 불멸의 찻잔이 해당 좌표의 원점에 정확히 위치해 있다면, 상황은 공간이 유한할 때와 다를 바 없다. 어항을 이루고 있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제 아무리 무한한 종류의 사물들이 탄생한다 한들, 어항 한가운데에 찻잔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종류의 제한"으로부터 어항은 벗어날 수가 없다. 혹자는 이 주장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점이 생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던 유한한 공간의 어항과는 달리, 지금 말하는 이 어항은 무한한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공간이 무한하다면, 그 공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의 수는 (설사 그곳의 특정 위치에 찻잔 하나가 항상 존재하고 있다 할지라도) 무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서 길이가 0에 수렴하는 막대 하나를 위치시켜 놓고, 무한한 시간동안 그 막대의 길이를 일정하게 늘려나가면서 마침내 무한에 수렴하도록 만든다면, 결국 어항의 한복판에 찻잔이 있으나 마나 어항이 취할 수 있는 종류의 총 갯수는 막대의 길이를 기준으로 "무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한, 만약에 어항의 크기가 유한하다 할지라도 "무한소"의 개념은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아무리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제한된 공간 속에는 무한한 종류의 미시적인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분자 단위의 조합 속에는 원자 단위의 조합이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에너지 입자들간의 조합이 있으며, 그 안에도 임의로 무한한 종류의 입자들의 무한한 수의 조합을 만들어낸다고 가정할 수가 있다. 결국 공간과 시간에 아무리 엄격한 제한을 둔다 하더라도 (또한 아무리 찻잔과 같은 영원불멸의 사물이 버티고 있다 하더라도) 공간의 구성 자체가 무한한 종류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