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제시해 볼 한가지의 가설은, 바로 "과거 또한 미래처럼 여러가지의 갈래들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미래가 다양한 가능성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과거도 다양한 가능성들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거에는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라고 단언하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과거를 미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자신감있게 "미래에는 분명히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자부하는 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들에게 "어찌하여 그대는 미래를 완벽하게 안다고 주장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럼 자네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었다는 것을 완벽하게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예상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듯이, 우리가 제아무리 다양한 증거자료를 가지고 과거에 대해 운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 자신의 기억을 통해 해독해내는 "과거"라는 것도, 미래와 마찬가지로 그 모양새를 한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또한 "일어났었을 수 있는 일들", 즉 여러 가능성의 갈래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누구도 그 갈래들 중 하나만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결국 시간이라는 것은 시작점과 종착점을 가지는 하나의 선이 아니라, 현재를 나타내는 점 하나와 그 점에 연결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의 갈래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방사형 모형일 뿐이다. 현재라는 것은 시공간 속에서의 관찰자의 위치, 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시점"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관찰자라는 말을 쓴 이유는 "현재"라는 것이 굉장히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운전자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운전자는 우선 A라는 구간 위를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B라는 구간 위를 지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각기 다른 시간대들을 가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운전자가 A구간을 지나갈 때의 시점"이고, 또 하나는 "운전자가 B구간을 지나갈 때의 시점"이다.
전자를 A시점이라 부르고, 후자는 B시점이라 부르도록 하자. 아까 말했던 상황에 근거했을 때, 운전자는 우선 A시점에 속했었고 그 다음에는 B시점에 속했었다. 여기서 우리는 운전자가 총 2개의 시점들에 속했기 때문에, 그가 총 2번의 "현재"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운전자의 첫번째 현재는 A시점에 위치해 있고, 두번째 현재는 B시점에 위치해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를 좀더 분명히 밝혀보도록 한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운전자를 하나의 "관찰자"라고 가정해 보자. 어쨌든 앞서 말한 상황에서의 시간은 운전자를 기준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찰자의 위치는 처음에는 A시점이었고, 그 다음에는 B시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찰자가 A시점에 속해 있을 때, 관찰자를 기준으로 하여 A시점은 "현재"이고 B시점은 "미래"이다. 물론 아까도 말했듯이 미래라는 것은 여러 갈래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B시점은 아직 100% 벌어질 것이라고 확정되지는 않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자, 이제 관찰자가 B시점에 속해 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이 새로운 상황에서는 관찰자의 위치가 B시점이다. 따라서 이때는 B시점이 관찰자의 "현재"이고, A시점은 관찰자의 "과거"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 또한 미래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능성의 갈래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일종의 모순이 생긴다. 운전자가 A구간에 있을 때는 "B구간을 지나간다"는 행위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일 뿐이고, 또한 운전자가 B구간에 있을 때는 "A구간을 지나간다"는 행위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미래와 과거는 확정 불가능한 가능성들의 집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나? 방금 전에 우리는 운전자가 A구간에 있을 때와 B구간에 있을 때를 두 개의 관찰시점들로 지정하고, 그것들을 기준으로 각 시간대를 "현재, 과거, 또는 미래"로 정의해 보았다. 그러나 관찰시점들이 두 개이다 보니, A시점은 현재임과 동시에 과거이기도 하고, B시점은 현재임과 동시에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모순은 바로 각 시점을 정의하는 방식들 사이의 충돌에 있다. 일단 A시점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운전자가 고속도로의 A구간을 지나가고 있을 때, A시점은 운전자의 현재임이 분명하고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운전자가 지금 이 순간 겪고 있는 일이 바로 A시점의 일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제 운전자가 A구간을 완전히 지나, 마침내 고속도로의 B구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는 운전자의 현재가 더이상 A시점이 아닌, B시점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 대신에 A시점은 운전자의 과거로 둔갑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아까 운전자가 A구간에 있을 때만 해도, A시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 즉 100% 벌어지는 것으로 확정되어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운전자가 B구간에 도달하게 되자, 이때부터 A시점은 운전자의 과거, 즉 운전자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자리잡은 "가능성의 갈래"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운전자는 더이상 A구간을 지나갔던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닥쳤던 일이었다고 단언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A구간을 지나갔었다고 주장하겠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의 기억은 조작된 것이오" 라고 말한다면, 그는 결국 자신이 했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히 운전자가 A시점에 있을 때는 A시점이 "분명히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B시점에서 보았을 때 A시점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가능성)"로 그 존재의 단계가 급감해 버린 것이다.
이는 모든 시간대들을 포함하는 전지적 시점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이다. A시점을 정의하는 방식이 이토록 확연히 다른 두가지로 나뉜다면,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나치게 추상적인 사고활동을 장려하기 전에, 우선 좀더 쉬운 방식으로 앞서 말한 모순을 해결해 보자. A시점이 현재와 과거라는 두 개의 다른 시간들로 표현되는 이유는, 바로 A시점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이 2명이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2명이기 때문에 A시점을 정의하는 방식도 두가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혹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아니, 분명히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던 인물은 운전자 한 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갑자기 관찰자가 2명이라고 하는가?"
물론 3차원적 공간을 생각할 때, 운전자는 딱 1명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도 공간을 이루는 또 하나의 차원임을 가정했을 때, 운전자는 시공간 안에서 A시점과 B시점에 둘 다 존재하므로 우리는 운전자가 2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명은 고속도로의 A구간에 위치해 있고, 또다른 한 명은 고속도로의 B구간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으며, 각자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의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관찰자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관찰자가 2명이라는 것은 즉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현재"의 갯수가 2개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관찰자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것"을 현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하기 때문에, 이들 중 하나가 가정하는 "현재"는 또다른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즉, 세상이라는 것이 하나 있을 때, 그 세상에 속한 "현재"들의 수는 그곳에 살고 있는 관찰자들의 수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