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다는 말은, 단순히 사물의 모양새만이 다양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똑같은 재질로 이루어졌고 정확히 똑같은 규격을 가진 두 개의 정육면체들이 있다 할지라도, 이 두 사물들의 이동방식이 서로 다르다면 우리는 이들을 서로 다른 종류의 사물들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을 무시하고 공간만을 생각한다면, 사물의 종류 판단에 있어서 그것의 이동경로는 파악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동경로에 따른 종류의 분류는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시간의 한 단면만을 볼 때는 사물의 속력과 가속력의 존재가 사물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공간의 축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축까지 차원의 일부로 포함하는 "시공간"을 생각한다면, 이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종류 분별에 있어서 이들의 이동경로 판별은 굉장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한 단면만을 볼 수 있었던 "공간"에서는 사물의 이동을 일종의 잔상으로만 살짝 표시할 수 있었음에 반해, "시공간"에서는 사물 그 자체와 그것의 이동경로를 통틀어서 하나의 3차원적인 곡선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극에서 발사되어 하와이로 떨어진 "미사일"이라는 사물은, 그것의 이동경로를 기준으로 하여 남극과 하와이를 잇는 하나의 포물선으로 나타낼 수 있다. 만약에 이 미사일과 완전히 똑같이 생겼고, 완전히 똑같은 기능을 하는 또다른 미사일이 알래스카에서 발사되어 남극으로 떨어진다면, 이 미사일의 아까 쏘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물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 형태는 동일하다 할지라도) 이 두 사물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이동경로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든 사물들의 모양새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물의 종류를 오로지 그것의 이동경로로만 정의해도 된다. 다만 여기에는 오류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각 사물은 또다른 사물과 맞딱뜨렸을 때에 이동경로를 바꾼다는 것이다. 즉 사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경로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동 가능한 경로들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있는 일종의 나뭇가지(또는 "가능성의 지도")형태의 데이터베이스를 운동의 초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일직선으로 움직이고 있는 파란색 당구공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에 아무런 주변 사물의 방해가 없다면, 이 당구공은 계속 일직선으로 나아갈 것이고, 여기에서 "일직선으로 나아간다"는 이동경로는 이 파란 당구공이 그 어떤 다른 사물과도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 경우에 가지게 되는 "고유경로"이다.
그러나 만약에 갑자기 주황색 당구공이 옆에 나타나, 파란색 당구공을 툭 쳤다고 치자. 그러면 충돌로 인해 이 두 당구공들의 이동경로는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흐트러져 버리고 만다. 파란색 당구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래 이 당구공은 A라는 경로에 속해 있었는데, 주황색 당구공과의 충돌로 인해 B라는 경로에 대신 속하게 되었다. A라는 원인에 의해 B라는 결과가 탄생한 것이다.
파란색 당구공의 시점에서 생각해 봤을 때, 만약에 주황색 당구공이 없었더라면 (= 아무런 "원인"이 없었더라면) 그것은 계속 일직선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전개를 하나의 굵직한 나뭇가지로 상상해 보자. 그리고 주황색 당구공이 있었을 때의 (= "원인"이 있었을 때의) 전개는 그 굵직한 나뭇가지의 중간지점에서 뻗어나가는 또 하나의 나뭇가지로 상상해 보자. 이 새로운 나뭇가지는 조금 전의 것 보다는 약간 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까의 것보다 하위단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사물이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거쳐갈 수 있는 경로는 그 사물에게 있어서 가장 상위에 속한 경로이고, 수없이 많은 외부적 요인들의 간섭 하에서만 거쳐갈 수 있는 경로는 가장 하위에 속한 경로이다.
파란색 당구공이 주황색 당구공과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은, 나뭇가지의 지도 상에서 보면 기존의 가지에서 또다른 가지가 시작되는 교차지점에 위치해 있다. 즉, 한가지 가능성의 갈래가 2개의 각기 다른 가능성들의 갈래로 나뉘어지는 곳이 바로 두 당구공들의 충돌위치인 것이다. 만약에 주황색 당구공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파란색 당구공은 계속해서 굵은 나뭇가지를 따라 이동했을 것이고, 만약에 개입이 있었더라면 파란색 당구공은 이동경로를 바꾸어 (각 나뭇가지는 경로를 상징한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바로 우리는 지금 파란색 당구공의 이동경로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파란색 당구공의 "종류"를 온전히 판단할 수 있다. 주황색 당구공의 이동경로까지 동시에 따지면서 파란색 당구공의 행동양식을 정의내린다면, 여기서 파란색 당구공에 대한 판단은 주황색 당구공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그 객관성을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어떠한 사물의 이동경로들과 그것들 사이의 연결관계를 파악할 때, 해당 사물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를 미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물의 종류를 단정짓는 것은 "그 사물이 실제로 어떻게 이동하냐"가 아니라, "그 사물이 가질 수 있는 경로들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물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경로들의 집합을 경로장(Path Field)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것은 중력장이나 전자기장처럼 시공간의 각 위치를 따라 분포해 있는 값들로 표현할 수 있는데, 분포된 값들이 벡터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직선/곡선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모든 사물은 각기 다른 경로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두 개 이상의 경로장들을 동일한 시공간 속에서 겹치면 경로장들 사이의 합성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합성은 경로장들을 입력받아 "확정된 경로들"의 집합을 반환하는 함수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함수 속에는 사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른 인과관계의 발현을 계산해 주는 알고리즘이 들어있으며, 이 함수를 통해 얻어진 "확정된 경로들"은 바로 해당 사물들의 정확한 이동방향과 위치들을 나타내어 준다. 왜냐하면 이 함수는 경로장이라는 "가능성의 갈래들"을 대입받아, 그것으로부터 모든 "불가능한 갈래들"을 추려내고 엑기스만을 남겨둔 채로 그것을 반환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경로장 그 자체를 "미로"에 비유한다면, 방금 말한 함수에 경로장을 대입한 값은 "탈출방법이 그려진 미로"에 비유할 수 있다.
쉬운 예를 위해, 다시 파란색 당구공의 경우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이 당구공의 이동경로는 두가지 갈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갈래는 이동 중에 주황색 당구공과 충돌하여 운동방향이 바뀌는 것이고, 두번째 갈래는 이동 중에 그 어떤 것과도 충돌하지 않은 채 그대로 쭈욱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에 파란색 당구공이 없었더라면 주황색 당구공의 존재여부도 불필요했을 테니, 여기서 우리는 첫번째 갈래가 두번째 갈래로부터 뻗어나갔다고, 또는 첫번째 갈래가 두번째 갈래의 "하위갈래"라고 말할 수 있다. 명칭이야 어찌됬던, 이 두가지 갈래들이 파란색 당구공이 취할 수 있는 이동경로들의 전부이다 (왜냐하면 파란색 당구공이 속한 이 공간에는 파란색,주황색 이렇게 2개의 당구공들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경로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보면, 소문자 y의 형태로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겠다. y의 짧은 획은 파란색 당구공이 주황색과 충돌했을 경우의 경로이고, y의 긴 획은 주황색과 충돌하지 않았을 경우의 경로이다. 이 y자 형태를 띈 이동경로들의 집합이 바로 파란색 당구공의 "경로장"이다. 다만 이 경로장은 빈 공간 안에 파란색 당구공과 주황색 당구공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 경로장을 기초로 한 파란색 당구공의 정의는 해당 공간 안에서만 유효하다.